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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세월을, 공간을 넘어 같은 꿈을 꾸다 -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김환기 <달밤의 화실> VS 마그리트 <인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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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복지일보 장민주 기자]미술작품 입니다 그림속 나무는 창밖의 풍경인지 풍경을 그린 그림 인지는 감상자의 마음속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다음은 변종필 미술 평론가의 감상 세계로 가 보겠 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다보면 우연히 시대를 뛰어넘고, 표절이나 모방과는 무관하게 전체적으로 비슷한 구도, 유사한 소재로 그려진 작품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김환기의 <달밤의 화실>과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Ⅰ>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전체적인 화면구성의 유사함이 시선을 끌었다.

 

외형적 구성만 유사할 뿐 작품에 표현한 조형적 특징이나 담고자 한 내적 의미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동서양을 떠나 시공간이 다른 곳에서 비슷한 구성의 그림이 탄생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두 그림을 놓고 내용과 의미, 표현기법, 제목과 그림의 관계 등을 비교해 보고 싶었다.



<도판 > 김환기<달밤의 화실> 1958.100x80.3cm /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Ⅰ>1933. 100x81cm

먼저, 두 그림의 이미지에서 오는 공통점과 차이점부터 살펴보자.

두 그림 모두 어느 특정한 공간에 놓인 이젤 위에 자연을 주제로 한 그림이 위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젤 위의 그림 속 공통 소재는 나무이다. 수종은 다르지만, 화면 중앙에 있는 구성이 뭔가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이와 다르게 두 그림은 낮과 밤이라는 대조적 상황과 구름과 달이라는 소재적 차이를 지녔다. 여기에 마그리트가 극사실적 표현으로 실재와 환상의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들고 있다면, 김환기는 모던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조형미로 서정성 짙은 화면구성을 취하였다.

 

달리 표현하면, 김환기의 그림이 특정한 시간의 한 공간(화실)의 상태(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은 특정한 풍경(상황)을 바라보는 주체자의 인식에 따라 풍경의 진위가 어떻게 달라 질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김환기의 그림이 감성적 측면이 강하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은 이성적 측면에 치우쳐 있다.

 

이제,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Ⅰ>부터 자세히 들여다보자. 맨 먼저 이미지와 제목의 불일치에서 오는 모호함이 궁금증을 유발한다. 어떤 것이 현실의 풍경이고, 어디까지가 풍경화인지 경계가 불투명하다. 캔버스의 하얀 측면이나 이젤의 고정 틀이 없었다면 영락없이 창밖의 풍경으로 인식하기 쉽다.

 

벨기에 출신의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독특한 오브제들로 구성한 화면으로 유명하다. 앙드레 브르통의 이론적 배경과 달리, 미로, 에른스트 등 꿈과 무의식을 주제로 작품세계를 펼친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것과 다르게 마그리트는 낯선 오브제들의 조합을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왜?’, ‘뭐지?’ 라는 궁금증을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유를 유도하는 그림을 그렸다.

 

일종의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는 행위가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일깨워주는 식의 철학적 의미를 강조한 그림이 많다.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오브제들로 조합된 비합리적 화면구성을 마주하고, 그 안에 감춰진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철학적 사고를 이어가길 기대했다.

 

 <인간의 조건>은 이 같은 마그리트의 의도를 담은 그림이다.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창가에 놓인 이젤 위의 그림과 창밖의 풍경이 서로 겹친 부분이다. 이젤 위 그림이 실재 풍경의 일부를 가리고 있다.

 

그 바람에 그림 속 나무가 창밖의 풍경인지, 풍경을 그린 그림인지 구분이 불투명해졌다.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면서도 이렇게 모호하게 그린 의도에 관해 마그리트는 ‘나무는 방의 내부와 실재 풍경의 외부 모두 감상자의 마음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라고 답했다.

 

그의 말을 풀이해보면 풍경이 그림 속에 있는지, 그림 밖에 존재하는지는 보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인간의 조건>은 그림으로 보이느냐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나무로 보이느냐는 감상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눈앞의 대상이 순간순간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과연 진실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러한 마그리트의 철학적 의미는 1947년의 <아름다운 폭포>, 1955년의 <유클리드의 산책>, 1964년의 <지는 저녁> 등으로 이어지며 그 지평을 넓혀갔다. 이 점에서 마그리트에게 그림은 하나의 사유의 공간이었다.

<도판  > 마그리트 <아름다운 폭포> 1947.55.5x66.5cm / <유클리드의 산책>1955. 162.5x130cm / <지는 저녁>1964.160.5x1114cm.
<도판 > 마그리트 <아름다운 폭포> 1947.55.5x66.5cm / <유클리드의 산책>1955. 162.5x130cm / <지는 저녁>1964.160.5x1114cm.
 

이번에는 김환기의 <달밤의 화실>을 보자. 이 그림은 마그리트의 그림과 달리 지극히 서정적이다. 실제의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그려낸 그림으로 제목에서 감지되는 시간과 공간성이 크게 엇나감 없어 보인다.

 

평면성을 추구하고 면적 화면분할로 화면의 조화로움을 꾀한 전체구성이 매우 시원하면서도 서정성이 짙다. 1958년에 그린 것으로 이른바 김환기의 파리시대(1956-1959)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마그리트가 철학적 사유를 목적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면, 김환기는 기억, 추억, 고향 등 개인적 감정을 보편적 미감으로 조형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고향이 있었다. 1956년부터 시작한 김환기의 프랑스 생활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국에 있을 때 보다 한국의 조형미 탐구에 관한 절실함이 깊어졌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에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조국의 모습이나 풍경을 화제로 삼았던 그림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고향의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1957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먼저 그렸던 <달밤의 화실>도 같은 맥락이다. 그림 속 이젤 위에 그려진 달과 도자기가 고스란히 1958년의 <달밤의 화실>로 이어졌고, 1958년의 그림 속 이젤 위 그림은 조국에서 한국적 조형성을 연구하던 시기에 그렸던 1954년 작품 <답교>를 보는 듯하다. 머나먼 이국에서 고향 풍습을 그리워한 화가의 마음이 읽히는 대목이다.

<도판 > 김환기<달밤의 화실> 1958 / <달밤의 화실> 1957 / <답교> 1954
<도판> 김환기<달밤의 화실> 1958 / <달밤의 화실> 1957 / <답교> 1954
 
이처럼 파리시대에 그린 <달밤의 화실>은 김환기가 고향을 마음에 담아 한국적 정서로 승화시킨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속 창밖의 달, 이젤 위 그림 속의 달, 바닥에 놓인 백자, 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기둥 벽면에 붙여진 선적 표현이 두드러진 두 장의 그림은 화면 전체를 색면으로 처리한 면적 구성의 단조로움을 없애며 회화성을 높이는 효과를 준다.

 

또 하나 이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면 전체에 감도는 푸른빛이다. 마치 화가의 고향(신안 안좌도)바다와 푸른 하늘이 섬을 완전히 휘감고 있는 것처럼 화폭의 푸른 색조가 더없이 푸르다.

마그리트의 색채가 김환기의 색채와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이 점에서 보면 김환기의 색채가 마그리트의 그림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깊이 잠재해있는 고향의 색채가 발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고향의 풍경은 김환기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당시 정체성의 근원이자 작품에 내재한 서정성의 뿌리였다. <달밤의 화실>은 김환기에게 한국의 정서를 가득 담을 수 있는 고향의 공간이었다.

 

결론적으로 김환기의 <달밤의 화실>과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은 비슷한 화면구성이라도 작품의 모티프와 그림에 담고자 한 정신에 따라 조형세계와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러면서도 두 화가의 그림은 단순한 재현이나 어떤 양식적 틀에 갇히지 않고 시공간을 넘어 그림에 담긴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세계를 구축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특정한 시대양식의 틀에 갇히지 않는 철학적 사유로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마그리트의 작품과 점?선?면의 최소 조형단위만으로 캔버스의 틀에 가둘 수 없는 무한 공간(우주적 질서)을 창조한 김환기의 작품은 동서양을 넘어 예술가의 생각이 이끄는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실감케 한다.

 

초현실주의 대표주자 르네 마그리트,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1세대작가 김환기, 두 사람의 그림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남긴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변종필 미술평론가
  

정리=장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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